부활의 증인공동체 협업(協業)
마가복음 16:6, 10-11 사도행전 12:3-11
‘사흘만 기다리세요, 모든 일이 다 잘 될 거예요.
사흘만 기다리세요, 어떤 슬픈 일도 기쁨의 더 좋은 일로 바뀔 거예요.’
길거리에서 꽃을 파는 동양계 노인의 숭고한 삶의 신념과 빛나는 지혜를 배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날은 가장 슬프고 괴로운 날이었지요. 그런데 주님이 하루 이틀 사흘 만에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 할렐루야! 어떤 슬픈 일도 아무리 고통스런 사건들도 사흘만 지나면 모든 게 제 자리로 돌아오죠, 모든 게 다시 좋아지고 더 행복하게 되던데요. 사흘만 기다리세요.’
예수님이~ 살아~나셨습니다~~~~~~.
최초의 부활의 증인, ‘마리아’의 하늘 닿는 환희에 찬 부르짖음!, 부활의 주님이 나타나 보이신 베드로 야고보 요한.....바울...500여 성도...확실한 ‘부활의 증인’들이 오늘 여기에도 이렇게 살아있습니다(막16:6,10-11). 살아계신 주, 생명의 말씀을 들었고, 보았고, 만졌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저도 분명코 살아계신 주님을 보았습니다. 오늘 여기에, 예수님이~살아~나셨습니다~~~~.
부활의 주일, 우리 삶속에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을 증명할 수는 없지만 그로부터 시대마다 오늘까지 기꺼이 목숨을 걸 수 있는 ‘부활의 증인’은 이렇게 이곳에도 산소망의 ‘부활 공동체’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언제나 현재적으로 역사하듯, 살아계신 예수의 부활의 역사도 언제나 현재적으로 역사합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의 삶의 자리에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만나 봅니다. 위대한 주의 사자 ‘바울’처럼 ‘육신의 눈’이 아닌, ‘영적으로’ 주님을 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습니다. ‘영적으로’ 주님이 하시는 일을 보고, 그 영원한 부활생명, 영원한 생명살림의 역사인 부활의 진리 역사에 함께 참여하는 자들은 참으로 복이 있습니다.
‘오늘과 내일은 가야할 길을 가며, 해야 할 일을 하다가, 제 삼일에 완전해지리라.’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것이며,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 세상뿐이면 우리는 가장 불쌍한 자이겠으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고전15).’
‘죽음의 죽음, 부활!’ 예수 부활을 믿는 ‘부활의 증인 공동체’가 함께 영원한 생명살림의 역사를 이루어 갑니다. 초대교회 부활의 증인공동체가 로마 감옥에 갇혀 죽음의 올가미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 사도 베드로를 살리기 위하여 함께 협력하여 협업(協業)하며, 간절히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 하늘에서도 협업(協業)하시어 그 천사를 보내어 죽음의 감옥에서 벗어나 자유하게 하십니다.
죄와 죽음의 감옥에서 건져내어 자유케 살려 내시려고, 하나님의 보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거룩한 영들과 천사들을 보내셨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구원 얻을 후사를 섬기라고 보내심을 받는 천사들을 만나 뵙는 자는 생명살림의 도움을 받습니다. 아브라함이 알아 본, 장막을 찾아오셨던 ‘하나님의 세 사람’, 롯이 알아 본, 소돔성의 ‘두 천사’, 야곱의 벧엘, 하나님의 집에서의 하늘 닿는 사닥다리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천사들을 알아보고 영접하여 교통하는 자들은 복이 있습니다. 이미 와있는 천사들의 역사가 지금도 부활의 역사를 이루기 위하여 바쁘게 빠르게 역동적으로 움직이며 활동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 부활의 증인공동체에서 살아계신 주님과 함께 천사들이 활동하게 하시며, 부활의 약속을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로마 감옥에 사형집행전의 사형수로 갇혀있는 베드로의 ‘탈출 가능성 0’,
그러나 하나님이 보내신 사자가 도우시면, 가능하게 되고 묶였던 것들이 해결되며, 갇혀있던 것들이 풀려지고 이루어지는 법입니다.
로마군인 ‘네 명’씩 ‘네 패’에 의해 감금되어 처형을 기다리고 있는,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의 ‘베드로’, 목에 칼이 씌워져있고 손발이 쇠사슬에 묶인 채, 죽어가고 있었으나 극적인 생명살림의 신기한 사건을 경험합니다. 육체의 눈으로는 볼 수 없으나 실재하는 ‘천사’의 인도하심을 따라 그 죽음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천사가 두 군병 틈 사이에서 죽음의 잠을 자고 있는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서 급히 깨우며 말합니다. 비몽사몽간에 눈을 뜬 베드로에게 말합니다. ‘일어나라!’ 베드로가 쇠사슬을 보이며 ‘이 걸 풀어줘야 일어나죠....’ 하지 않고 말씀을 따라 일어나니, 손과 발의 쇠사들이 그저 풀렸습니다. ‘옷을 입고 신을 신고 나를 따르라’ 말씀하니, 베드로가 앞서가신 천사를 뒤따라갑니다. 제정신이 아닌 채로 그러나 천사의 뒤를 따라 가다보니, 감옥의 첫째 문, 둘째 문...이 저절로 스스로 열렸습니다. 눈을 시퍼렇게 뜨고 감시하고 있던 로마의 군사들, 간수들이 보는 데에서 그렇게 유유히 그 앞을 지나 감옥에서 나와 새로운 자유를 맛봅니다. 죽을 생명이 살아나,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더욱 확신 있고 열정적으로 살아가게 됩니다(행12:1-13).
주께서 보내신 사자, 이제도 실존하는 우군 ‘천사’로 인해 죽음에서 살아난 베드로!,
죽음의 감옥에서 풀려 참으로 자유로운 부활의 증인된 삶을 살았던 베드로를 바라보며, 삶과 죽음의 문제를 깊이 생각해봅니다. 누구도 죽고 싶어 하지는 않지만 죽어야 하는 ‘모순의 극치’인 ‘죽음’!, 죽음이란 무엇일까? 인간은 죽음 후에 한 줌 흙처럼 아무 것도 없이 무(無)의 상태로 흩어져버리고 마는 것일까? 이 생에서의 삶의 공과(功過)로 인해 더 나쁘게 혹은 더 좋은 것으로 다시 태어나는 윤회로 환생의 순환고리 속에서 끝없이 돌고 도는 것일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죽음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보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를 통해서만 풀 수 있는 인류최대의 운명적 과제입니다.
‘죽음’은 개념일 뿐, ‘살아있음’에 비교되어 나타내진 ‘죽음이라는 개념’을 진리로 바르게 정립하여 죽음을 그리스도 안에서 극복하고 참된 기독교 신앙으로 승화시켜야 합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죄의 감옥, 죽음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참으로 자유케 하리라.’
인류역사와 인간의 삶의 가장 중요한 문제인 죽음, 죽음을 바라보는 철학적, 과학적, 종교적 관점이 저마다 다릅니다. 죽음을 단절(斷絶), 무(無), 윤회(輪回):환생, 회귀(回歸), 지속(持續)으로 보는 다양한 형태의 견해와 신념이 있습니다.
죽음, 단절이다. 죽는 순간 모든 것이 다 없어지고 마는 것, 무(無)로 돌아가는 것이다. 현세만 있을 뿐, ‘내세(來世)’는 없는 것이라 주장합니다. ‘내세관’이 없는 것은 종교가 아닙니다. 유교는 엄밀히 말하자면 종교일 수 없습니다. 현세의 인간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인간관계의 정도(正道)’,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설파한 공자의 ‘유교’는 미래의 세상 없이 현재의 현상세계의 삶에 제한 되어있다 할 것입니다. 사후, 조상의 혼령이 지상에서 120여년, 머물다가 없어지는 것이어서 본질적으로 죽음을 일종의 단절로 본다 할 것입니다.
반면 과학에서는, 4차산업혁명의 초지능시대, 사이보그나 인공지능을 통하여 죽음자체가 없는 새로운 생명체, 신인류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죽음, 윤회이다. 불교에서 석가모니의 가르침대로 시간속에서 윤회하며 끝없이 환생한다. 이 생에서 좋은 일을 하면 다음 세상에서는 좋은 것으로 환생하고...이 생에서 나쁜 일을 하면....나쁜 것으로 환생...사람이 또 다른 사람이나 개, 돼지 , 소, 바퀴벌레....로 환생한다....?
죽음, 회귀이다.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죽음 후에는 자신의 삶이 그대로 과거로 회귀되어 무한 반복되는 것....영원 회귀....아~ 지겹겠다...
부활이란 윤회의 환생이나 회귀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한번 오@@이면 영원한 오@@, 자신의 정체성이 바뀌지 않으면서, 더 좋은 오@@로 바뀌는 것이 부활인 것입니다. 인생의 연속선상에서, 죽음 후에도 @@@의 인생은 단절되거나 윤회 또는 회귀되지 않고, 모습을 달리해서 더 좋은 인생으로 업그레이드되면서 지속되는 법! 부활의 그날, 마지막 천사의 나팔소리가 나면,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몸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부활의 신령하고 거룩하고 영광된 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고전15:52-54). 육체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나, 육체속의 영혼은 하늘의 영원한 거처로 돌아가게 되고, 부활의 그 날을 기다리며, 기도하고 있을 것입니다.
영혼의 무게 21g.
‘맥두걸’, 삶과 죽음이 무엇인가, 죽음 후에 어떻게 될 것인가를 깊이 생각해오던 메사추체스의 의사가 임종직전의 환자를 세심히 관찰한 후, 인간의 영혼에 관한 화제의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영혼의 무게 21g’, 5명의 환자가 임종 후, 그들의 몸무게를 재보니 21g에서 24g이 줄었다 합니다. 아하~ 인간이란 영혼과 육체가 합해져 인간의 삶이 영위되는 것, 죽음이란 육체에서 영혼이 빠져나가는 것이니, 그로인해 21-24그램이 줄어드는 것이겠으니, 영혼의 무게 21그램. 그로부터 백년이 지난 후 스웨덴의 한 의료컴퓨터 회사에서 똑 같은 실험을 했습니다. 환자 100여명 모두가 임종직후, 정확하게 21.24679그램이 줄었음을 확인하고 다시 권위있는 의학전문지에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영혼의 무게 21그램.
우리는 영혼의 무게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 무게가 21그램이든 24그램이든 100그램이든.....다만 육체의 기능이 다하여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 순간, 육체와 더불어 삶을 만들어갔던 영혼이 이제 돌아가게 되는 그 영원한 거처에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죽음 후, 부활 승천하여 돌아가신 바로 그 하늘의 영원한 거처! 이 세상 삶이 끝나는 삶의 종말, 죽음 후에 시작되는 그 영원한 거처에서의 거룩한 새출발에 가슴뛰며, 부활의 환희의 순간을 소망합니다. 아멘 할렐루야!
‘인간과 기계’, ‘신이 된 인간: 호모데우스 Homo Deus’, 사람의 감성도 장착된 알고리즘으로 인간과 사랑에 빠지게 되는 인공지능 이야기, 아카데미 각본상의 명화 ‘Her 허’, AI 인공지능의 초지능 초연결의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인간과 관계의 본질, 삶과 죽음의 참된 의미는 무엇인지를 통찰하여 올바로 깨달아야 됩니다. 이 ‘영적 쓰나미’의 시대에 참사람다운 인간의 진리의 삶, 부활의 증인 공동체답게 교회와 성도의 본질을 참되고 바르게 전하며, 참되고 건강하고 바르게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부활의 진리를 증거하는 하늘을 증거하는 진리의 성전,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왕래하며, 둘째사망이 없는 첫째부활의 약속을 이루고 있습니다. 부활의 그리스도 약속의 토대위에 세워진 진리의 증인의 부활공동체, ‘첫째부활에 참여하는 자는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의 해가 없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동안 왕노릇 하리로다(계20:1-3).’ 부활의 증인 공동체의 협업으로 필연코 부활의 영광을 함께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영혼이 돌아가는 하늘 아버지의 영원한 곳, 우리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대속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 아버지께로 돌아가셔서 그 영원한 거처에 죽음후의 그리스도인들을 거하게 하시며 부활의 약속을 이루십니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산소망, 부활의 참된 소망을 이루게 될 그리스도의 참된 공동체는 그 영원의 거처에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거장 ‘피카소’의 그림을 모든 사람이 다 알아보고 감동하지는 않습니다. 피카소는 보는 것을 그리지 않고 보여져, 알게 되고 믿게 된 것을 그리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영혼이 머물게 되는 그 곳에 관한 복된 소식을 다 받아들여 함께 동참하며 협업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육신의 눈으로 보여지지 않는 부활의 주님의 신세계이기 때문이며, 영되신 하나님과 그의 아들을 통하여 이루시는 보내심의 역사, 신령한 진리의 영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알게 하시는 성령의 은혜로 알게되는 자만, 받아들여 동참할 수 있습니다. 알게 하시는 은혜로 보여지는 자만, 영적으로 보고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만, 동참하여 부활 진리의 증인 공동체로서 협업하게 됩니다.
하늘 영원의 거처로부터 오는 복음, 다시 사는 부활의 복된 소식을 받아 들이십시오. 부활을 증명할 수는 없지만 오늘도 부활의 증인이 존재합니다. 부활의 진리로 참된 인생, 행복의 기쁨의 삶을 살아가세요. 사흘만 기다리세요. 오늘과 내일이 지나면 제 삼일에 완전해 질 것입니다. 부활의 증인 공동체로 썩지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거룩한 일을 함께 동참하여 협업(collaboration)하는 자는 천복이 있습니다.
부활의 증인 공동체 협업.